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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달인 16년

게시판에 새로운 글이 없길래 한번 올려 봅니다. 그동안 대전모이세 소식지에 매달 글을 올렸었는데 1월 소식지가 마지막일줄 알았건만 후임 신부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2월호 까지 제가 쓰고 말았네요. 이곳 원신흥동에 와서 말이죠. 아래의 글은 이주사목부 대전모이세 소식지 2월호 1면에 실리는 제 글입니다. 그동안 썼던 글 중 생각해 볼만한 것들 골라 종종 올리겠습니다.

 

 

 

달인 16

 

최근에 종영된 개그콘서트라는 개그 프로그램에 달인이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항상 16년 동안의 수련을 거쳐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소재로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주는 코너 입니다. 예를 들면, 16년 동안 한 번도 숨을 쉬지 않으신 헐떡김병만 선생님!, 16년 동안 한 번도 잠에서 깨신 적이 없는 움찔김병만 선생님, 16년 동안 비데에서 세수를 하고 일상생활의 대부분을 비데를 활용해 생활한다고 하는 비데의 달인 양변기김병만 선생님 등등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참 많던 프로였습니다.

 

거짓말처럼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사제가 된지 16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서봤음에도 해가 갈수록 더 긴장하고 떠는 제 모습을 봅니다. 아직 달인이 되려면 멀었나 봅니다. 처음 사제품을 받았을 때는 오히려 자신감에 넘치는 말과 행동들을 했었지만, 이제는 반대로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더욱 조심스러워 졌습니다. 그래서 더 긴장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그 이유는 두 친구를 만나고 나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마치 세상과 교회를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처음 보는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때론 심하게 울컥거리기도 했습니다. 정신은 점점 또렷해 졌지만 몸의 기운은 다 빠져나가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그 친구의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는데, 이름 하여 부정맥입니다. 그렇게 처음 만나게 된 그 친구와 지금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요즘은 작은 긴장과 스트레스만으로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제 겨우 사십 중반을 지나고 있는 팔팔한 꽃 중년인 저에게 또 다른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바로 허리 디스크, 그것도 왼쪽 허리에만 찾아온 퇴행성 디스크! 처음 사제가 되었을 땐 잘도 고개를 들 수 있었습니다. 허리와 목에 힘을 주고 자신감 있게 행동하며 어쩌면 많은 사람들을 내려다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말이죠. 하지만 지금은 허리를 피려면 디스크가 왼쪽만 있어서 인지 몸이 떨리면서 자세가 무너지며 고개가 떨궈집니다.

 

저에게 찾아온 이 두 친구 덕에 여러모로 참 불편합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불편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이제 감사하려 합니다. 열린 입이라고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숨을 막아버려 주기 때문에 감사하고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라고 허리를 흔들어 고개를 숙이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이게 정말 감사한 일인가 싶지만 저에겐 감사한 친구들입니다. 오히려 그들로 인해 제 삶이 더 긍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했고, 세상과 사람을 보는 시선도, 행동도 달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여기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일정 수의 또라이가 존재한다는 법칙입니다. 내 위에 상또라이가 있다 해서 팀을 옮기면, 옮긴 곳에 똑같은 또라이가 또 있습니다. 조금 덜 또라이다 싶으면 대신 그런 놈이 여러 명 있다고 합니다. 도저히 못살겠다 싶어 장소나 모임이나 종교나 직장을 바꿔보면 거기에도 역시 똑같은 또라이가 있다는 법칙입니다. 예외는 거의 없습니다. 만약 내가 이를 악물고 버텼더니 어느 날 그 또라이가 모임이나 직장을 그만두는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뻐하긴 이릅니다. 그 자리에는 또 다른 또라이가 들어옵니다. 만약 "내 주위에는 또라이가 없는데?" 싶으면? 그 또라이가 바로 본인입니다. 이게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입니다.

 

저에게는 부정맥과 디스크라는 또라이 친구들이 있습니다. 내가 속한 모임이나 직장, 공동체 안에 이런 또라이..가 아닌 친구들이 있듯이 말입니다.  이 친구들이 참 불편하기도 하고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없이 많이 해봤습니다. 하지만 마냥 불평하며 외면하기를 멈추고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니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새로운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철이 들었다 고나 할까요.

 

처음 이주사목부 대전모이세에 언지도 없이 갑작스럽게 부임 했을 때의 마음이 어쩌면 그랬던 것 같습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고 외면하고 싶었던 심정. 하지만 이내 받아들이고 살아보니 이 땅의 이주민친구들이 얼마나 어려운 처지에 있는지, 그동안 나는 왜 모르고 살았었나 부끄럽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이주민들과 5년의 동고동락이 끝나고 저는 이제 새로운 부임지로 가게 되었습니다. 후회와 회환, 힘들고 아픈 것도 많았지만 정말 많은 것을 얻고 배우고 떠납니다. 이주민 친구들과 지병이 저를 더 겸손해지게 만들어 준것 같네요. 이 또한 주님의 은총이겠죠.

 

그동안 저를 기억해주시고 소식지 글을 읽어주시며 기도해 주신 모든 은인, 후원자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 인사드립니다.

 

- 대전모이세 전담사제 이진욱 미카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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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이진욱미카엘

등록일2020-01-21

조회수2,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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