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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성 성경공부 (2)

구약의 잔혹한 하느님에 대해 우리가 참고할 만한 3가지 견해를 소개하고자 한다.


1) 하느님의 점진적 교육 방식 또는 친구 사귀기 (divine pedagogy approach)

이레네오(Irenaeus) 성인과 테르툴리아노(Tertullian) 성인은 마르시오니즘을 이단으로 배격하였다. 성인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가르치실 때, 인간의 눈높이에서 점진적 방법을 택하신다고 보았다. 쉽게 설명하면 우리가 자녀에게 우주를 가르칠 때, 아기일 때는 밤이 오면 태양이 잠자러 들어간다, 다음 단계에서는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지동설과 빅뱅에서 시작된 우주 진화론까지, 이렇게 점진적으로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 어떤 말도 거짓이거나 자녀를 잘못된 길로 끌고 들어가지는 않는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와 이미 그곳에 살고 있던 다른 민족과의 생존 투쟁이 불가피했던 이스라엘의 눈높이에서 이해할 수 있는 하느님은 적을 완전히 깨부수는 가장 강력하고 힘있는 신이었다. 이와 같이 원시적 수준에서부터 시작하여 조금씩 발전시켜 마침내 신약에서 완전한 계시를 보여 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점진적 친구 사귀는 방식으로도 이해 될 수도 있다. 누구든지 처음 만나서 서로를 낱낱이 알 수 없듯이 친구 사귀는 과정이 필요하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는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서 걷는 소리를 들었고,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 갔다고 전한다. 하느님을 한 인격적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당신을 무엇이라고 소개해야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는 야훼 라고 가르쳐 주셨는데 그 뜻은 나는 나다 이다. 듣기에 따라 그런 어리석은 질문을 왜 하느냐? 로 들리기도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1225-1274)First uncaused cause란 철학 용어를 생각나게 한다. 아퀴나스 성인은 모든 존재는 그 원인(cause)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원인을 역으로 추적해 가면, 마침내 외부로부터 오는 원인에 의하지 않고, 영원으로부터 스스로 존재한, 모든 존재의 원인(First uncaused cause)인 한 곳에 도달하는데, 그 분이 바로 하느님이라 하였다. 또 이사야를 통해서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라고 당신에 대해 알려 주셨다. 마침내 예수님을 통해서는 당신이 모든 것을, 심지어 생명까지 내어 주시는 사랑 그 자체 이심을 가르쳐 주셨다. 처음 만남에서 모든 것을 다 가르쳐 주시지 않고, 완전한 계시에 이르기까지 점차적으로 가르쳐 주셨다는 것이다.

 

2) 하느님의 정의 실현 방식 (Divine justice approach)

아우구스티노 성인,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 그리고 신학자인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William Lane Craig, 1943-)는 하느님의 정의 실현 관점에서 완전봉헌물을 해석하였다. 내용을 요약하면,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그것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에게는 생명을 빼앗는 권한도 있다. 때때로 하느님께서는 정의 실현을 위해 생명을 빼앗아 죄인을 단죄한다. 하느님께서 정의를 세우실 때 간접적인 방법(secondary cause)을 택하기도 하신다. 악하고, 살인하고, 우상숭배하는 예리코를 벌하기 위해 이스라엘 여호수아 군대를 보내셨다. 하느님은 축복을 주실 때도, 물론 직접 내리시기도 하지만, 천사, 성인, 사람을 통하여 간접적(secondary cause)인 방법을 택하실 때가 많다. 사실 모든 관계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게서 비롯된다. 삼위일체는 세 분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에 대한 교리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엮기 위해 직접적 원인(first cause)으로 활동하기도 하지만 간접적으로 더욱 개입하신다.

 

3) 영적 문제에 대한 풍자적 접근

오리젠(Origen, 184-253)과 존 카시안(John Cassian, 360-435)은 묵시록이 가장 나중에 쓰여진 성경이기 때문에 묵시록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고 하였다. 묵시록에 따르면 천상 법정이 연상되는 장소에서, 일곱 번 봉인된 두루마리(성경)가 제시되지만, 그것을 펴거나 볼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이가 없었고, 마침내 살해된 어린 양이 두루마리를 받는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님이 전체 성경 해석의 궁극적 렌즈가 되어야 한다는 시각이다. , 창세기에서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살해된 어린양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관점에서 성경을 읽으면, 구약성경은 야만적이고, 잔혹하지 않고 일관된 메시지를 던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인물은 모세가 아니라 여호수아(Joshua)이다. 예수의 히브리 발음은 예수아(Yeshua)이므로 구약의 여호수아는 신약에서 예수를 상징(precursor)한다. 여호수아의 군대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다면 예수는 구원의 땅으로 들어가신다. 물론 예수님의 군대는 교회다.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 물론 먼저 그 땅에 붙어 살고 있었던 여러 부족들과 충돌은 있었겠지만, 여부스, 히타이트, 아모리 등의 부족은 여호수아가 맞닥뜨린 잔혹, 증오, 폭력, 미신 그리고 우상 등의 온갖 죄악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구약 사무엘 상권 15장에 따르면 사울이 아말렉과 싸운 다음 전리품을 완전봉헌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양과 소를 끌고 와서 따로 챙겨 두었다. 이스라엘의 처음 왕 사울을 세운 사무엘은 이 행위를 비난하면서 아멜렉 임금 아각을 난도질한다.

 

현대적 관점에서 적국의 가축을 죽이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더우기 포로가 된 적국의 왕을 난도질하는 잔인한 행위가 이해되지 않지만, 죄악은 조금도 남겨두는 말고 난도질해서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 사울은 죄에 맞서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죄와 적당히 싸우고 적당히 맞서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자신을 위해 일정 부분을 떼서 품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오리젠은 구약성경에서 잔혹하게 약탈하고 인종청소를 일삼는 하느님을 보지 말고, 영적 투쟁이 그만큼 치열해야 한다는 것을 촉구 한다.

 

작은 죄가 때로는 흥미롭기도 하고, 그까짓 것 언제든지 떼어 버릴 수도 있으니,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것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오산이라는 것이다.

 

반면 예수는 십자가에서 조금의 타협도 없이 세상의 모든 죄와 전쟁을 시작했고 그것들을 난도질 했을 뿐만 아니라 죽음과도 싸워 승리했다는 것이다. 사실 약속의 땅에서 민족 간의 충돌은 불가피했겠지만 완전봉헌이 고증된 경우는 1도 없었다. 성경은 역사서이지만 동시에 정교하게 공들여 쓰여진 신학적이고 영적인 기록이다 (theologically elaborated history).


속성 성경공부 (3)으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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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Y안드레아

등록일2021-04-29

조회수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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