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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김대건 신부님!

 
신부님, 신부님, 우리 김대건 신부님!
    지난 5월 제주교구로 성지순례 갔다가 용수성지에 들렸습니다. 성지 마당에는 작은 목선 하나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이 배는 길이 13.5미터, 너비 4.8미터로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신부님이 타고 입국하신 라파엘 호를 복원한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1845년 8월 17일에 중국 상해 금가항 성당에서 조선교구 3대 교구장이신 페레올 주교님에게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주 후에 주교님을 비롯한 13명의 일행과 함께 라파엘 호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그런 작은 배로 망망대해를 건넌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모험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김 신부님 일행은 40여 일의 항해 도중, 여러 번 폭풍우를 만나 침몰의 위기를 넘기면서 9월 28일에 제주도 용수리 해안에 표착하였습니다. 김 신부님은 불과 몇 달 전에도 조선에서 구입한 라파엘 호를 타고 상해로 가는 길에서 그런 고생을 하였습니다. 라파엘 호는 1845년 4월 30일에 제물포를 출발하여 6월 4일, 상해에 도착하였는데, 사흘 동안 밤낮으로 계속된 큰 폭풍우 때문에 김대건 신부님과 동행한 신자들은 죽을 고생을 하였던 것입니다. 신부님은 공포와 절망에 사로잡혀 어찌할 줄 모르는 신자들에게 성모님 상본을 보이면서 믿음을 잃지 말라고 계속 격려하셨다고 합니다. 사실 성 김대건 신부님의 생애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1836년 4월, 15세의 나이로 모방 신부님에게 세례를 받고 신학생 후보로 선발되어 그해 12월 고국을 떠나 다음해 6월, Macau에 도착하여 사제수업을 시작한 이래로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실 때까지 수고와 어려움으로 점철된 삶을 사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처형 직전에도 군중을 향해 이렇게 호소하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 행복을 찾으려면 천주를 믿으시오.” 고난으로 점철된 삶에서도 김 신부님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조선교회에 대한 사랑은 결코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굳건한 믿음과 사랑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께서는 믿는 이들의 마음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시어 환난 중에도 인내와 끈기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게 해주십니다.(제2독서) 또한 예수님께 대한 충실 때문에 박해받는 이들에게 해야 할 말을 일러주십니다.(복음) 지금 우리는 과거처럼 박해를 두려워할 필요 없이 신앙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에 대한 도전은 황해의 노도처럼 거세고, 온갖 유혹은 보이지 않는 오랏줄처럼 우리를 옭아매고 있습니다. 한국의 사제들이 더욱더 성령께 의탁하면서 김대건 신부님께 전구를 청하여 굳건한 믿음과 사랑으로 무장하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신앙을 위협하는 거센 파도와 힘차게 싸우고 교묘한 유혹의 올가미를 결연하게 벗어던지며 주님의 복음을 확신 있게 선포하면 좋겠습니다. 십자가형에 처해진 성 안드레아는 마지막 순간에도 하느님을 희망하고 그리스도를 기억하였습니다. 그는 신앙을 고백하며 그리스도를 닮고 그리스도처럼 죽기를 희망하였습니다. 한 줄기 빛이 성안드레아를 비춥니다. 이 빛은 하느님의 구원의 빛이었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루카 9,23-24 참조) 서울대교구 손희송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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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별빛

등록일2013-07-09

조회수7,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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