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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있는가?

 
하느님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있는가?
    당신께서 떠나실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주셨던 마지막 선물이 ‘평화’(요한 14,27) 이었고, 문을 꽉 닫아걸고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서 주셨던 첫 선물도 ‘평화’였다. 그리고 우리는 미사 때마다 “일찍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하셨으니…….” 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상기하고 서로에게 평화를 빌어준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은 듣는 사람을 상당히 당혹스럽게 만든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53). 예수님 자신의 사명이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으며 거기에 더하여 그분을 믿음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질 결과는 가정의 평화와 일치가 아니라 분열이라는 말씀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우리나라의 천주교 신앙 전래는 외국의 선교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선조들이 학문을 연구하던 중 스스로 진리를 깨닫고 신앙의 길을 찾았다는데 그 큰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처럼 자랑스럽게 탄생한 교회가 걸어야 할 길은 처음부터 모든 것이 가시밭이었다. 조선 천주교 창립 후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1785년 3월 김범우 순교자가 갖은 고문을 당한 뒤 충청도 단양으로 귀양 보내어진 을사추조 적발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당연하게도 천주교 신자가 있는 가정에서는 자기 집안에 불행을 가져올지도 모를 이 종교를 버리게 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었고, 이 와중에서 가족 간의 갈등은 물론 가정이 와해되는 아픔을 겪는 事情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한국 천주교의 선구자 광암 이벽(李檗) 선생이 있다. 그의 아버지 이부만은 아들을 배교시키기 위해 갖가지 묘책을 짜내지만, 끝내 고집을 부리자 마지막 방법으로 목을 매 자살을 기도한다. 이것을 본 이벽은 부모를 배신할 수도, 하느님을 배반할 수도 없는 현실 앞에서 한동안 자신의 신앙을 감추고 외부와 연락을 끊은 채 살아가지만, 결국 자신의 배교적 행위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방황하다가 33살의 젊은 나이에 길 위에서 삶을 마감하게 된다.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이러한 시련과 아픔들 위에서 성장했던 것이다. 신앙을 가지고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주님의 진리를 따라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먼저 자신 안에서 가치관 대립으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으며(로마 7,19~23). 또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이들과 필히 대립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가족들 사이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지금도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이러한 갈등을 겪고 있다. 단지 그것을 어떻게 주님의 가르침에 일치시켜 평화를 이끌어 내느냐가 내 몫으로 남는 것이다. 이 몫을 잘 하기로 하자. 전주교구 이득재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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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별빛

등록일2013-08-19

조회수7,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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