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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여, 삼가고 두려워하라

 
 
부자여, 삼가고 두려워하라
    오늘 복음에서 이 비유 말씀의 주된 대상은 가진 자들로 보입니다. 돈을 가지고, 권력을 가지고, 이 사회에서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는 이들입니다. 이천 년 전의 이 비유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얼마나 잘 들어맞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먼저 좀 살펴봤으면 하는 것은, 소유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내 것’이라는 개인 내지 단독 소유 관념이 현대 자본주의의 출발이요 핵을 이루고 있습니다. 나만의 소유 의식에 사로잡히다 보니 부자가 라자로에게 한 것처럼, 바로 이웃의 고통에 눈감기 십상입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과 더불어 자연환경 파괴를 만들어내고 있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폐악을 생각해 보면, 사적 소유 관념이 얼마나 많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공유의 관념을 확대해 나가야할 것입니다. 개인 소유의 범위는 필요 최소한으로 줄이고 가능한 많은 영역을 공용으로 소유해야 합니다. 이 세상 전체가 실은 우리 모두에게 공으로, 선물로 주어진 것임에 대한 깊은 자각이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봤으면 하는 점은, 사물을 파악할 때 전체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일부분만 보며 판단하면 자연히 사물을 왜곡시키지 않겠습니까.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자와 여자를 함께 알아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삶과 죽음의 문제도 마찬가지 맥락입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다만 신앙의 힘에 의해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고, 놀라운 희망을 안고 있을 따름입니다. 事情이 이러하기 때문에 그저 육신이 살아 있는 이 생명 내지, 삶이 전체인 양 알아듣고 행동해서는 많은 부분에서 왜곡과 오류를 피하기 힘들 것입니다. 부분이 아닌 전체로서는 저울추가 늘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법입니다. 저승에 있는 부자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라자로 또한, 삶과 죽음을 함께 한 전체의 입장에서는 온전한 저울의 평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事情이 이러하다면 우리는 살아생전, 죽음을 염두에 두며 얼마나 많은 행동과 생각을 삼가고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까. 때문에 현세에서 평등과 정의를 위해 투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끝으로 짚었으면 하는 점은, 이런 모든 事情을 알아듣는데 무슨 특별한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부자가 이야기하듯, 죽은 이가 살아가서 메시지라도 전해야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지극히 건강한 상식과 양심을 지닌 이라면 누구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왜 회개가 필요한지 아주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행동으로 나아가는데 특이한 체험이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지극히 단순하고 명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부자는 더더욱, 자신이 무슨 길을 어떻게 걷고 있는지 지극히 삼가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십자가형에 처해진 성 안드레아는 마지막 순간에도 하느님을 희망하고 그리스도를 기억하였습니다. 그는 신앙을 고백하며 그리스도를 닮고 그리스도처럼 죽기를 희망하였습니다. 한 줄기 빛이 성 안드레아를 비춥니다. 이 빛은 하느님의 구원의 빛이었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루카 9,23-24 참조) 예수회 수도원 유시찬 보나벤투라 신부
(이 글은 꾸르실료 카페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http://cafe.daum.net/cursi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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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별빛

등록일2013-09-30

조회수7,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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