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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송인찬 아오스딩 신부님 대림특강(1) 全文</b>

송인찬 아오스딩 신부님 대림특강(1)-全文

◆ 일시 : 2013. 12. 12. (목) 20:00~21:00
◆ 장소 : 원신흥동성당

[주제]
대림시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부담으로 다가오는 판공성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시작기도](마태 13,1-9)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좋으신 아빠, 아버지! 오늘 부족한 저를 통해서 여기에 모인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딸들의 마음속에 작은 복음의 씨앗을 뿌릴 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하루뿐만 아니고, 연말에 여러 가지 혼란하고 흔들리는 마음들, 특별히 대림시기를 통해서 당신의 오심을 준비하는 그런 좋은 시간들로 변화시켜 주시고 지치고 힘든 저희의 영혼과 마음에 당신의 풍요로운 은혜를, 풍성한 은총을 허락하셔서 1시간 동안 기쁘고 즐겁고 은혜로운 말씀을 나눌 수 있도록 이끌어주소서. 좋으신 성모님과 함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2013년도 한 해도 저물어 갑니다. 우리 교회는 세속적으로 마지막 달인 12월을 전례적인 첫 월로 시작하고 있지요. 한 해의 끝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시작인데,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생각과 만감이 교차하시겠지만 대림시기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출발,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출발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희망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끝은 곧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대학을 졸업한다는 것은 배움의 끝이면서 새로운 사회생활의 시작입니다. 결혼을 한다는 것은 연애의 끝이면서도 곧 험난한 결혼 생활의 시작입니다. 지난 11월에 위령성월을 보내면서 우리보다 앞서 주님 곁으로 가신 분들을 생각하고 그분들을 위해서 기도를 했지요. 왜 연옥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할까요?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지상의 시간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축일은 그 분이 순교하신 날로 정합니다. 지상에서는 인간적으로 비참할지 모르지만 순교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에서 새롭게 태어나신 날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이 시기는 그냥 흘려보내는 시기가 아니라 반드시 이 대림시기를 잘 잡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혹시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매일 똑같은 날이고 매년 이맘때쯤이면 연말이고 성탄이고 하다보면 송년 모임하고 그러는데 뭐가 그렇게 새롭다고 하는가? 교회는 뭐가 그리 새롭다고 할까?
정치를 보아도 시국도 어수선하고 사회를 보나 새해가 올해보다 나빠지면 나빠졌지 더 좋아질 것 같지 않은데 교회는 왜 새롭다고 얘기를 할까? 우리가 한 번쯤 되돌아보아야 할 것은 뭐냐, 새로운 한 해에 정말로 기대할 것이 없는가? 없을 것 같지만 정말로 없는가? 그리고 혹시라도 기대할 것이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아기예수님이 오신다고 하는데, 이번 성탄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번쯤 생각해 봐야할 일입니다.

사실 인간은 무언가를, 누군가를 기다리며 사는 존재들입니다.
비록 하루하루 힘들게 사는 사람일지라도 어제보다는 나은 오늘이고 싶고, 또 오늘보다는 나은 내일이고 싶은 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여러분도 미래가, 장밋빛 미래가 아닐지 몰라도 하루하루 열심히 달려오신 게 아닙니까?
만약에 우리에게 이런 자그마한 희망조차 없다면 우리의 삶은 그저 견뎌내야 하는 슬픈 현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 희망을 어떻게 담보할 수 있을까요?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스산하고 어설픈 시기를 절망이나 두려움이 아닌 희망과 기쁨으로 살아가게 만들 수 있을까요?

그 희망의 핵심에는 성탄, 크리스마스가 있습니다.
신앙인들만이 아니라 크리스마스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들, 일반인들도 세상 사람들도 막연히 성탄을 기다립니다. 누구나 한 해의 끝에서 드리는 감사가 있기 마련이고 또 새로운 한 해에 더 좋은 일이 많아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이 시기, 12월의 시기의 한가운데에는 바로 성탄이 있습니다. 성탄이라는 희망의 불꽃이 우리가 바라고 있는 크고 작은 것들을 다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막연한 바람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속엔 어떤 희망이 있습니까? 혹시 아무런 희망도 어떤 준비도 없이 이 설레는 대림시기를 그냥 그렇게 흘려보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혹시 사순시기처럼 우울하고 무겁게 지내시지는 않으십니까?

신앙인이라면 비록 나의 현실이 어둡고 힘들더라도 보이는 것 이면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손길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 은총의 시기를 꽉 움켜잡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소중한 나날의 의미를 깨닫고 기꺼이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생일을 앞두고 있는데 그냥 흘려버리거나 흥청망청 보내면 안 되겠지요. 세상 모든 일에도 첫 단추를 잘 꿰매야 나머지 단추가 잘 꿰지듯이 하느님께서 주신 2014년 한 해의 처음을 잘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대림시기는 우리에게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대림시기의 의미를 새로운 출발과 시작의 시간이라는 차원에서 말씀드리고, 두 번째, 대림시기는 기나긴 목마름의 시간이고 그리움의 시간이라는 점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 혹시 누군가를 그리워 해보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어릴 적에는 누가 그리울까요? 엄마 아빠나 할머니 할아버지가 그리울 수 있겠고, 또 젊은 날에는 나를 떠나갔거나 헤어진 그 사람 때문에 가슴이 시릴 때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현재 직장 생활이나 학업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지낸다면 가족이나 부부 서로가 그리울 것입니다.
나이가 먹어서는 좀처럼 오지 않는 자식들, 불러도 오지 않는 자식들, 또 눈에 밟히는 손주가 그립고, 또 오늘같이 추운 날에는 같이 이불 덮고 자던 떠나간 임자의 자리가 너무 커서 남몰래 눈물을 흘릴 때도 많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평생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지금 여러분은 누구를 그리워하고 계십니까? 없다면, 모든 것이 다 갖춰져서 없을 수도 있습니다. 감사드려야겠지요.

그러면 우리 신앙인들은 이 시기에 누구를 그리워해야 되겠습니까?
예수님! 그렇지요. 우리가 항상 내 자식들처럼 우리 부모님처럼 항상 그리워할 필요는 없지요. 그래도 이 대림시기만큼은 주님을 그리워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의 중심이 되셔야 하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시편 63편의 저자도 주님께 대한 목마름을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을 찾습니다.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합니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이 당신을 애타게 그립니다. 당신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고 이렇듯 성소에서 당신을 바라봅니다. 당신의 자애가 생명보다 낫기에 제 입술이 당신을 찬미합니다. 이렇듯 제 한평생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 부르며 저의 두 손 들어 올리오리다. 제 영혼이 비계와 기름을 먹은 듯 배불러 환호하는 입술로 제 입이 당신을 찬양합니다. 제가 잠자리에서 당신을 생각하고 야경 때에도 당신을 두고 묵상합니다. 정녕 당신께서 제게 도움이 되셨으니 당신 날개 그늘 아래서 제가 환호합니다. 제 영혼이 당신께 매달리면 당신 오른손이 저를 붙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내 목숨을 노리는 저들은 멸망으로, 땅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리라. 칼날에 내맡겨져 여우들의 몫이나 되리라. 그러나 임금은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고 하느님을 두고 맹세하는 이들은 모두 자랑스러워하리라. 정녕 거짓을 말하는 입은 틀어막히리라.”(시편 63, 1-12)

이 시편처럼 예수님, 하느님을 그리워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주로 어떤 때 주님을 찾게 되나요? 대부분 어려울 때, 병이 들었거나 우리 집안에 큰 우환이 있거나 할 때 주님을 찾으십니다. 물론 그렇지 않으신 분들도 많이 계시지만, 신자분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이런 시기에 주님을 많이 찾으시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대림시기는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이 오시는 예수님을 그리워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물론 지금 하셔야 할 일도 많으시고 복잡한 일을 하시면서도 내 마음의 중심은 예수님을 그리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분은 어떤 분이신가?
바로 필리피서 2장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필리 2,6-9)

우리가 그리워하는 분은 아주 화려한 왕궁에서 화려하게 태어난 그런 분이 아닙니다. 방 하나도 없어서 마굿간 한 켠에 그것도 구유에 오셨습니다. 
왜 그렇게 오셨는가?
지체 높으신 데서 태어나셨다면 어디 목동들이 경배할 수 있었겠어요? 아무리 가난하고 미약한 사람이라도 누구나 가서 만지고 바라볼 수 있도록 아기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아기는 누가 봐도 악하지 않습니다. 겸손하고 순수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분은 가난하고 낮아지신 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비움과 낮아짐과 겸손을 잘 닮는다면, 그동안 우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갈라지고 등 돌리고 서로 외면하였던 장벽을 뛰어넘어서 원신흥동 본당 공동체가 한마음으로 그리워하고 만날 수 있는 기쁨을 누리시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희망이, 설렘이 기쁨과 확신으로 바뀌는 변화의 시기를 사실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대림시기가 어떤 시기냐?
설렘과 희망이 기쁨과 확신으로 바뀔 수 있도록 깨어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대림 1주 말씀이 뭐였어요? 12월 첫 날, 깨어 기다리라.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40)
물론 여기서는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내용이지만, 가깝게 본다면 우리 삶 안으로 성탄이라는 시간 안으로, 우리가 마음을 열고 있을 때 그분께서 찾아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오신다고는 하는데 준비가 없으면 이게 부담이 되는 거예요.
과거 학창시절을 생각해 보시면, 시험기간이 다가오는데 만일 시험 준비가 안 되었다면? 하루하루가 지옥일 거예요. 소화도 안 되고..
운동경기를 하려고 하는데 훈련이 안 되었다면 시합이 어렵게 되죠. 
이처럼 우리가 준비가 안 되었다면 부담스럽고 걱정이 됩니다. 우리 집에 만약에 본당신부님이 오신다, 그러면 청소하시고 빨래하시고 막 뿌리시고 그러시겠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시장님이 오신다, 아니면 더더욱 그럴 리는 없겠지만 대통령이나 교황님이 오신다면 도로를 새로 깔아야겠죠.
어쨌든 나에게 중요한 분이 오시면 오실수록 나의 준비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오시는 분 중에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 오신다면 내 준비는 어떠해야 할까요? 그냥 이 시기를 흘려보낼 수 있겠는가? 예수님이 시장님보다 못하신 건가? 아님 대통령보다 못하신 건가? 아니죠? 그래서 우리가 정말 준비를 잘 해야 하는데, 준비를 잘 한다는 것은 비워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오시나요?
뭐, 세상 구원하러 오시고, 나를 좋게 만들어 주시고, 은혜 주시고 은총 주셔서 올 한 해도 잘 시작하라고 오시는데, 내 안에 미움과 질투와 시기와 절망이 가득 차 있다면 그분이 들어오실 수 있겠어요? 왜 못 들어오실까요? 들어올 자리가 없는데 열고서라도 들어오셔야 되는 것 아닌가요? 그거는 예수님도 그렇게 하실 수가 없어요, 왜? 내 마음에 가장 소중한 자유의지를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내가 그분께 열어 드리지 않으면 그분이 억지로 들어오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많이많이 비워낼수록 많이많이 내 마음이 그득하게 은총으로 채워진다는 원리를 제가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대림과 성탄의 두 가지 축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대림시기를 통해서 잘 비워내시는 것, 비움, 비움 있어야만 충만히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성사로 바라본다면 고해성사가 우리 자신에게 차 있는 것을 가장 잘 비워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그 비워진 곳으로 주님께서 성체성사를 통해 가득히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대림시기와 성탄시기를 보내면서, 이 두 가지 고해성사와 성체성사가 있는데, 제가 다음 주에 또 옵니다. 이번 주는 고해성사, 특히 판공성사 보고 계시죠? 그래서 도움을 드리려고 합니다.

가끔요, 고해성사를 드리다보면 참 어려울 때가 있는데, “죄인에게 강복하소서, 고해한 지 지난 판공 이후 처음입니다.” 그러니까 지난 봄에 보셨다는 애기죠? “주일미사 3번 빠졌습니다.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하여도 통회하오니 사하여 주소서.”
아 참 난감해요. 그것이 고해성사를 잘 못 봤다는 게 아니라, 뭐가 죄인가를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여러분은 고해성사를 받기 전에 무엇에 대해서 주로 생각하시나요? 비춰볼 수 있는, 이게 죄인가 아닌가를 판단해 볼 수 있는 게 뭐가 있어요? 십계명이 있죠. 그 다음에 자매님들이 많이 말씀하시는 게 있는데, 저는 남자라서 잘 모르지만 음식물 버린 것, 그것도 단골 메뉴에요. 운전하시다가 욕한 것, 뭔가 그렇게 한 것, 그런데 사실은 요, 내가 받은 게 굉장히 많은데 하지 않은 것이 더 죄스러울 때가 많아요.

내가 고해소에 가기 전에 주님은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내가 잘못을 뉘우치기 전에도 내 잘못을 다 알고 계신데, 왜 내가 깨닫기를 원하시나? 주님은 우리가 올바로 더 성숙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고해소에 오시면 신부님이 또 말씀도 해주시잖아요? 그러면서 내가 잘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하고 그래서 오늘 제가 중점적으로 말씀드릴 것은 「고해성사 생활」에 대해서 말씀드릴까 합니다. 그래도 되겠죠? 어려우세요? 저는 어렵게 못 합니다. 그냥 편안하게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고해성사 참여율을 살펴보면, 점점 감소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작년(2012년)에 한국 천주교회 교세통계를 보면, 재작년보다 작년에 고해성사를 본 비율이 3.6% 줄었습니다. 계속 하향곡선이예요. 다음 주에 말씀 드릴테지만 미사 참례율도 계속 하향곡선입니다. 작년에 서울대교구 사목국에서 서울에 있는 큰 본당 9개 본당의 열심하다는 구역장 반장 이런 분들에게 설문조사를 해보니까, “언제 고해성사를 보십니까?” 했더니, 열심하다는 분들도 고해성사를 판공성사 때만 본다고 응답한 비율이 무려 70%나 되었습니다. 1년에 겨우 두 번만 본다는 얘기죠. 열심한 분들도..그럼 왜 이렇게 못 나오시냐? 왜 성사를 멀리하시냐 하면, “바쁘다”, 그리고 “부담스럽다”.. 

아마 여러분들도 다 비슷한 이유실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바쁜 일상이고 부담스러운 일상인데, 왜 이렇게 고해성사를 교회는 강조하는가? 그리고 고해성사에 대해서 뭐가 문제고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지만 고해성사를 보는 분들이 많아질까? 고해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충만한 은총의 생활을 할 수 있게 할까? 저는 고민을 하는 겁니다.

여러 가지 분석을 해 볼 수 있겠지만, 인과응보의 법칙이 있죠? 인과응보의 법칙에서 보면, 여러분들 고해소에 왜 오십니까? 일단 죄라는 것이 먼저 딱 떠오르죠? 그런데 신앙인이 고해소에 들어오는 일을 꺼린다는 현상, 다시 말해 고해성사를 잘 안 보시는 이유를 우리는 두 가지 원인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고해성사의 재료가 되는 죄를 안 짓는다. 안 지으니까 고해소에 들어오실 필요가 없는 거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주일 미사 세 번 빠졌습니다.” 이게 다 인거죠.
저도 솔직히 죄 안 짓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저도 일은 주님의 일은 하지만 인간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저도 잘못을 많이 저지릅니다. 생각과 말과 행위로...여러분 동의하시죠?
그러면 죄를 짓는데, 내가 하는 것이 죄인줄 모를 수가 있습니다. 의식을 하지 못할 수가 있어요. 이거는 무지에서 올 수도 있어요. 어린애가 도둑질이 죄일 줄 모르고 하는 경우도 있어요. 죄에 대한 의식이, 죄의식하고는 좀 다른 겁니다. 죄의식은 내가 막 죄졌다고 느끼고 하는건데 그런게 아니고, 죄에 대해 별로 인식하지 않는 것, 사실은 이 뒤에 것이 오늘날의 문제입니다. 한 가지 제가 예를 들어볼게요. 북극 에스키모인들이 늑대를 어떻게 잡는 줄 아세요?
사슴피를 받아 그 사이에 예리한 칼을 얼려 놓는 거예요. 늑대가 피 냄새 맡고 오겠지요. 피를 계속 핥다가 나중에는 따뜻한 피가 나오는 거예요. 결국 과다출혈로 죽는다는 겁니다. 그 피가 누구 피예요? 자기의 피인 겁니다. 이게 죄의 무서움입니다. 죄의 결과는 우리 자신을 우리 영혼을 망치게 하는 것입니다.

죄는 달콤함으로 우리를 유혹하지만 결국 우리를 죽음으로, 여기서 말하는 죽음이란 하느님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겁니다. 오늘날 천국과 지옥을 어떻게 설명하냐면, 천국은 하느님과 나와 완전히 일치된 상태가 천국이고, 지옥은 하느님과 나와 완전히 떨어진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도 천국과 지옥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다면 그 상황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실 적에 병자성사를 제대로 받고 돌아가시는 경우가 제가 보기엔 반반인 것 같아요. 갑자기 위급하게 돌아가시는 경우도 있고, 병자성사의 은혜도 아무나 받는 게 아니라 잘 준비할 때, 여건이 맞아줘야 가능한 것입니다.

어쨌든 신앙인에 있어서 죄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오늘날은 이 죄를 그럴 듯 하게 포장을 해서 우리가 죄인 줄도 모르게 지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천당 문명에 길들여져서 죄에 대해서 무심하게 지나기가 쉽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다 풍요롭고 은혜로운 삶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걱정하신 교황 요한바오로 2세께서 이미 30년 전에(1984년도) 우리나라에 오셨을 때, 참회와 화해에 관한 문헌을 내시면서, 현대사회에 만연한 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내놓으셨습니다. 무엇이 죄의 기준인가를 교회가 정해준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사명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하는 죄라는 것이 뭐냐, 그 기준을 한번 잡아보자는 겁니다. 그리고 죄에 대해 의식하고 살아왔나 새롭게 각성해 보자는 것이고 그럴 때 우리는 대림시기를 잘 보내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럼, 죄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정의가 있어요. 지금 말씀 드리는 건 사회에서의 경범죄 경제사범 같은 걸 말씀드리는 게 아니고요. 신앙생활 영적인 부분을 말씀드리는 건데, 죄를 이해하기 위한 심오한 이야기를 우리는 창세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첫 번째 아주 유명한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거예요. 두 번째 이야기는 창세기 11장에 바벨탑 이야기입니다. 그 두 가지를 말씀드려 볼게요.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야기를 볼 때,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선악과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하느님께서 계명을 주셨어요. 이걸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걸 한 거죠. 그러니까 하느님 명령을 거부한 겁니다. 십계명에서 부모님에 효도하라고 했는데 효도 안하고, 거짓말 하지 말라고 했는데 거짓말 하고, 여러 가지 그런 것들.. 하느님이 죄를 지으라고 요구한 게 아니죠. 죄를 지으면 내가 지은 겁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하느님의 사랑을 하느님의 계획을 인간이 거부한 겁니다. 그리고 거기엔 유혹이 있습니다. “하느님처럼 똑똑해 질 거다.” 우리 인간의 마음 안에는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진시황, 이집트 파라오의 미이라, 인간복제 등 인간은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는데, 인간의 한계는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해 보려고 노력을 하는데 그게 극복이 안 되니까. 하느님으로부터 얻는 게 아니라 내 스스로 쟁취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하다하다 안 되니까, 내 유전자의 분신인 자식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자신이 죽을 거라는 것을 알면 자기 씨를 남기고 싶어 합니다. 부모로서 자녀에 대한 사랑도 있지만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본성은 영원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을 악마는 유혹했고, 아담과 하와는 따먹었습니다.

두 번째로 바벨탑 이야기를 본다면, 우리가 저 높은 데 탑을 쌓아서 거기 가서 일치하자 그런 제안을 합니다. 여기서는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의 계명을 어긴 것은 아녜요. 자기들끼리 일을 하면서도 하느님을 배제했다는 겁니다. 이거는 불효나 비슷해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힘이 없고 경제력이 없고 하시다고 편찮으시다고 해서 우리끼리 다 해 놓고 결과만 알려드린다고 하면 그 얼마나 섭섭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인간들끼리 일을 하면서도 그분이 하실만한 일이 전혀 없는 듯이 그분을 망각하고 무관심에 빠져 있는 것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바벨탑 이야기의 공통점이 뭐냐면, 내 자신의 삶에서 하느님을 제외시켰다는 점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하느님께 대한 불순종, 인류 역사를 보면 그때그때마다 다를 수 있지만, 때로는 무신론, 오늘날 공산주의도 그럴 수 있지만, 하느님께서 나의 삶을 지배하신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 것, 이것을 죄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죄의 본질을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제가 그 유명한 루카복음 15장의 말씀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즉, 3가지 비유, 탕자의 귀환(잃어버린 아들),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비유라고 하는데, 그걸 인용해보겠습니다. 잘 아시니까 본문을 안 읽어드려도 되겠죠? 길어서, 잘 아실 겁니다. 큰 아들, 작은 아들, 아버지 배역이 3명인데, 주인공은 아버지죠. 아버지에 초점을 두어 말씀드리려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아버지의 무력감과 기다림을 잘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는 왜 작은 아들이 집을 나가도록 재산을 나눠 줬을까요? 재산을 나눠주면 분명히 제 살림 할 거라는 걸 알거든요? 아버지는 왜 그랬을까? 혹시 능력이 모자라서 작은 아들이 나가는 걸 막지 못했을까? 작은 놈이 나가서 흥청망청 막 쓰다가 돼지를 치는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졌다는 건데 그 때 아버지가 그걸 몰랐을까? 알지요. 아버지가 모를 리가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떠나보낸 것은 아들의 자유를 존중하고 기다렸다는 점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나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 복음에 쓰여져 있지는 않지만, 아들이 집을 나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 바로 앞에 무슨 얘기가 나오냐면, 잃어버린 양의 비유가 나오죠.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온다는 얘기..저 같으면 오라줄로 막 치면서 왜 이놈아 너 때문에 얼마나 내가 힘들었는줄 알아? 하면서 끌고 왔을 텐데, 왜 목자가 양을 질질 끌고 오지 않고 왜 어깨에 메고 왔을까? 보통 무게도 아니었을텐데.. 

목자는 그놈이 나간 이유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 99마리가 한 놈을 왕따시킨 거예요. 물론 그놈이 엉덩이에 뿔난 것처럼 이상한 성향을 가질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놈이 99마리한테 적응을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목자가 그놈을 데리고 와도 또 나가고 하니까 걔만 있으면 다행인거고 걔만 없으면 불안한 거예요. 그러니까 목자가 때리지 않고 어깨에 메고 용기 내라고 메고 오지 않았을까..이건 제 묵상인데..

그래서 이 작은 놈도 늘 사고치는 놈이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아버지는 혼내고 달래고 여러 번 했겠지만 말을 안 들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을 실패한 듯 싶습니다. 아버지는 저놈이 자기 발로 걸어 나가야 자기 발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안 겁니다. 아들이 갖은 고생을 할 때에도 아버지는 그냥 무기력하게 있었던 겁니다. 마치 운전하면서 긴 터널을 뚫고 나가듯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아들을 기다린 겁니다. 

이 작은 아들의 잘못은 다른 게 아니고, 자신의 행복이 아버지 집에 있다는 것을 잊고 떠난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떠난 것입니다. 뿌리가 떠나면 나무가 자기 생명의 근원인 땅에서 뽑히면 어떻게 돼요? 서서히 말라죽지요.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작은 아들만 죄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함께 머물렀던 큰 아들도 사실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나아가서 큰 아들은 하나 뿐인 동생을 결코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왜 사랑하지 않았을까? 형제들도 보면 다 성향이 틀려요. 4-50%는 잘 못 지내요. 하여간 여기서 예수님이 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걸 보면 사랑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죄라는 걸 알려 주십니다. 큰 아들은 분명 물리적으로 아버지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미워하던 동생이 살아 돌아와서 아버지가 그놈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어 주실 때, 동생이 돌아온 것도 못마땅한데 그놈을 위해서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주시는 아버지의 처사가 더 못 마땅했던 것입니다. 큰아들은 어쩌면 아버지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서 아버지 곁에 머물렀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동생이 집을 나갔을 때 재산을 반으로 나누어 주셨던 아버지의 태도에 실망과 분노가 있었던 것입니다. 동생이 안 돌아왔으면, 어디 가서 죽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에 큰 아들이 자기 동생을 사랑했더라면 작은 놈을 위해 그렇게 기뻐하시는 아버지에게 적어도 이런 표현은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뭐라고 했냐,,“보십시오 아버지,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시는군요. 무지무지 섭섭하고 분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큰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것입니다. 왜? 그래야 상속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아버지가 큰아들의 마음을 몰랐느냐, 다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큰아들의 마음을 풀어줍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네 것이다.” “그러니 죽었던 네 동생이 살아왔으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는 관계설정을 해 주십니다.

오늘 시간이 금방 갔지요? 너무 길게 하면 다음 주에 안 오실 것 같습니다.
제 말씀을 정리하자면, 고해성사는 하느님의 자비의 성사다. 성체성사가 당신 자신을 내어주는 성사라면 고해성사는 끌어안는 성사다. 하느님이 나를 받아들이시는 거다.
죄의 상태에 빠져있는 우리가 그저 해야 할 것은 뭐냐면, 내가 깨끗해진 내가 그분께 가는 게 아녜요. 우리는 그런 천사가 아닙니다. 작은 아들이 했던 것처럼 그냥 내 모습대로 아버지께 가는 겁니다. 그리고 나와 같이 연약하고 유혹에 빠지고 있는 내 가족, 내 남편 아내, 자식들, 친정 부모님, 시부모님들..하느님이 내 잘못을 인정하시는 것처럼 나도 그분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 뱃속에 똥 있지요? 저도 있어요. 그 말은 무슨 얘기냐면, 우리 서로 똑같은 사람들이란 겁니다. 그런데 나는 깨끗한데 너는 왜 그렇게 사냐.. 이런 것은 우리 하느님께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이 아닙니다.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은 많은데, 이건 제 욕심이고 오늘 날도 추운데 다음 주에 더 풍성한 이야기로 찾아뵙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줄이고 마침기도 하겠습니다.

“좋으신 하느님 아버지! 오늘 당신의 오심을 준비하는 소중한 대림시기입니다. 사회 세상 사람들은 흥청망청 대면서 이 시기를 그저 흘려보내는 낭비의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저희는 저희 삶 가운데로 오시는 당신을 준비하면서 더 없이 거룩하고 설레는 그리움의 시간임을 깨닫게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런 시간이 당신의 오심을 잘 준비하면서 저희 안에 들어 있는 부끄러운 것들, 죄스러운 것들, 더러운 것들, 특별히 고해성사를 통해서 잘 비워내고 비워진 저희 안에 당신을 잘 맞이해서 풍성한 2014년도를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저희에게 허락해 주소서. 이렇게 추운 날 성당을 가득 메워주신 우리 형제자매님들의 건강과 하시는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도록 이끌어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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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유헌식요한

등록일201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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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헌식요한

| 201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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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송신부님 첫 특강 때(12월12일) 많은 분들이 오셔서 직접 들으셨지만, 못 오신 분들을 위해서, 또 저나름 다시 듣고 싶어서 요약한 내용을 함께 나눕니다.(한글 파일로도 첨부하였으니, 필요시 글씨를 키워서 보세요.)
이 내용은 제가 빠르게 받아 적었기 때문에 군데군데 내용이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널리 이해해 주시고, 이번 주 목요일(12월19일) 송신부님의 두 번째 특강에 새롭게 참여하시는 분들에게 다소나마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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