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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교류)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말씀 묵상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말씀묵상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그런데 작은아들이, ‘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많이 들어본 탕자의 비유 말씀입니다. 오늘 비유와 같이 회개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같이 메시지가 확실한 복음은 강론으로 쓰기 어렵습니다. 결론이 뻔하기 때문이죠. 회개하면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두 팔벌려 환영하고 받아주신다.

 

오늘 말씀을 들으며 저는 첫째 아들의 모습에 눈길이 갑니다. 어떻게 보면 둘째 아들과 아버지의 만남과 받아드림으로 끝이 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첫째 아들의 말과 행동은 그저 아버지의 넓은 마음을 더 크게 보여주기 위함이라 느껴집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의 청자는 바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입니다. 바로 첫째 아들들이죠. 지금까지 살면서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은 그들, 그러나 그 어떤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그들, 또한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둘째 아들의 행동을 단죄하고 받아드리지 못하는 모습, 마지막으로 그 죄인을 용서하고 받아드리고 기뻐하시는 아버지를 받아드리지 못하는 그들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가 세리와 죄인들을 받아드리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입니다. 그 죄만을 보고 그 사람까지 멸시하고 단정지어버립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이런 말이 생각이 납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그러나 우리는 죄를 통해 그 사람까지 미워합니다. 이는 요즘 뉴스들을 보면서 많이 느낍니다.

 

요즘 뉴스는 코로나19에 대한 기사들로 넘쳐납니다. 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주의 깊게 보는 것이 바로 우리 동네 확진자입니다. 이런 뉴스의 댓글을 보면 확진자를 향한 악플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리고 그 악플을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동조하곤 합니다. 확진 판정을 받은 분들이 과연 걸리고 싶어서 걸렸을까요? 만약 그분들이 나에게 소중한 분들이었어도 그렇게 악플을 달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조심하지 못하고 돌아다닌 분들은 조심하지 못한 잘못은 있습니다. 하지만 댓글들을 보면 그 잘못을 넘어서 그 사람 자체를 비난 하는 글을 볼 때면 마음이 참 아픕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분명 죄는 단죄하십니다. 하지만 사람 자체는 단죄하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죄만을 보며 사람자체를 단죄하는 오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보며 이 글을 보시는 우리만은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세리와 죄인을 가까이 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투덜거립니다. 그들도 예수님과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이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 마음이 다르게 표출되어 죄인들과 세리들을 더 싫어한 것은 아닐까요? 첫째 아들이 둘째 아들을 깎아 내리며 아버지께 투덜거린 것과 같이 말이죠. 악성 댓글을 단 사람을 보면서 그들 역시 관심과 사랑을 드려야하는 사람임을 다시 한 번 느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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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주은빈

등록일2020-03-14

조회수2,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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