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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교류) 사순3주간 금요일 말씀 묵상

사순3주간 금요일 말씀 묵상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8ㄱㄷ-34

그때에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28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여기 사진이 한 장 있습니다. 벌판에 앙상한 뼈를 드러낸 흑인 소녀 한명이 웅크리고 주저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멀리 뒤에는 이를 노려보는 듯 한 자세로 앉아 있는 커다란 독수리가 한 마리 보입니다. 마치 약육강식의 세계인 동물의 왕국을 보는 듯한 장면입니다. 갈비뼈를 드러내며 웅크린 아이의 모습이며, 이를 뒤에서 지켜보는 듯 한 독수리의 모습이 담겨있는 이 사진은 누가 봐도, 뒤이어 일어날 일에 대해 같은 상상을 할 법 합니다.

 

이 사진은 1994년에 수단의 굶주린 아이라는 제목으로 퓰리처 상을 받은 케빈 카터의 사진입니다. 그는 남아공 출신이며 3명의 동료 사진기자들과 뱅뱅클럽이라는 이름의 팀을 만들어 함께 활동하던 기자였습니다. 그들은 주로 소요 사태가 일어나는 곳, 전쟁, 사회적 모순 등이 일어나는 위험한 곳을 주로 다니며, 이 사실을 사진으로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자처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소속사 없이 프리랜서로 일하던 케빈은 1993년 돈을 빌려 내전지역이었던 수단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아요드라는 곳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전쟁난민들의 사진을 찍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한 소녀가 급식센터로 힘없는 발걸음을 옮기는 장면을 목격하고 이내 카메라 셔터를 누르죠. 바로 이 때 찍은 사진이 바로 수단 내전의 참상을 알리는 계기가 되어 퓰리처 상을 받게 된 수단의 굶주린 소녀라는 사진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케빈은 1994년 영예롭게 상을 수상한 후 3개월 뒤에 자살하고 맙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사진이 세상에 공개 된 후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진을 두고 논쟁을 시작했기 때문이죠. 이 논쟁은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질문과 흡사하게도 소녀가 먼저냐, 사진이 먼저냐였습니다. 사진만 본 수 많은 사람들은 케빈을 향해 독설을 쏟아냈습니다. “굶주리는 소녀가 눈 앞에 있으면 당장 먹을 것과 물을 주었어야 하지 않느냐?”, “뒤에 있던 독수리가 소녀를 잡아먹기를 기다린 거냐?”,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사진을 먼저 찍을 생각을 할 수 있느냐? 사람 맞느냐?”, “소녀의 죽음은 니 책임이다”. 이처럼 케빈의 퓰리처상에는 꼬리표처럼 인간성 대신 상을 택한 그라는 모욕어린 수식어가 따라 다녔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그로 하여금 죽음을 택하게 만들었던 것이죠.

 

동료들에 의해 나중에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소녀는 다시 일어나 급식소를 향했고, 독수리는 우연찮게 소녀의 뒤편 멀리에 앉아 있었던 것 뿐이었습니다. 당연히 사진을 찍은 후 케빈은 멀리 있더라도 혹시 모를 위험에 독수리를 쫒았고 아이가 급식소에 잘 들어가기 까지 지켜줬다고 합니다.

 

여기서 같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습니다. 결과적인 면에서 수단으로 향하는 수많은 해외 원조를 촉발시킨 사진이 먼저여야만 했을까요? 아니면 당장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는 소녀를 위해 카메라를 내던지고 그녀를 도왔어야만 했을까요? 저라면 소녀를 살리기 위해 먼저 도왔을 것 같습니다. 소녀가 당장 위험에 처해 있었다면 말이죠. 마찬가지로 케빈도 당장 소녀에게 긴급한 도움이 필요했다면 카메라를 던지고 뛰어갔을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말하기 좋아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사실의 내용도 모른채 그저 윤리 도덕이라는 기준을 앞세워 케빈을 난도질 했던 것이죠. 그들이 얼마나 사람을 위해서 케빈처럼 목숨 걸고 위험한 곳으로 뛰어들며 살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계명이 첫째이며 먼저냐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 율법학자의 질문에 케빈의 이야기가 떠오른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사진이 먼저냐, 도움이 먼저냐”, “하느님 사랑이 먼저냐? 사람 사랑이 먼저냐?”. 분명한건 케빈은, 소녀에게 당장 자신의 도움이 절실했다면 도와주는 것이 맞지만, 그런 상황이 아니었기에 더 큰 도움을 만들기 위한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이고,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이 먼저인건 맞지만, 사람에 대한 사랑이 곧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기에,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곧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신다는 사실입니다.

 

율법학자는 이렇게 말했고 그리고 하느님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듣습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라고 말이죠. 번제물과 희생 제물 모두 하느님께 드리는 최고의 경배 예식이었고 이는 당대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최고의 방식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하느님을 극적으로 사랑하는 방식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가르치고 계신 것이에요.

 

사진기자 케빈의 마음 속엔 내전으로 인해 처참한 생활을 하는 가나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케빈으로 하여금 위험한 곳에 뛰어들게 만들었고 사진을 찍게 만들었고 해외원조를 촉발하게 만들었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케빈의 마음속엔 이미 사람에 대한 거대한 사랑이 내재되어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과도 부합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마음이 내재되어 있다면, 사람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런면에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하는 우리가 첫 번째로 가져야 하는 마음은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마음이 기본 바탕이 되었을 때 우리는 사람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며 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진리임을, 그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최고의 사랑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진욱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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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이진욱미카엘

등록일2020-03-20

조회수2,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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