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회원가입

자유게시판

(영적교류) 성주간 수요일 말씀묵상

성주간 수요일 말씀묵상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0,4-9

4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누가 나의 소송 상대인가? 내게 다가와 보아라.

9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해마다 느끼는 성주간의 느낌은 저에겐 언제나 똑같습니다. 전운이 감도는 긴장감이랄까요? 아니면 폭풍속의 고요 같은 느낌을 항상 받곤 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구요. 그 이유는 당연히, 부활을 기다리는 초조함이 막바지에 다다랐기 때문이겠지만, 성월요일부터 시작되는 이사야서의 고난받는 주님의 종의 노래때문이기도 합니다. 해마다 하는 같은 말씀에 대한 묵상이지만 해마다 새롭고, 해마다 느낌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해마다 몸 둘 바를 몰라 할 정도로 소스라치게 감사함을 느끼곤 합니다.

 

부제품을 받기 전 30일 대침묵 피정 동안 치열하게 사제성소에 대해 고민하고 갈등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안 되겠다 싶어 곡기를 끊고 열흘간 단식을 시작했었죠. 모든 것이 새로워 보이기 시작했고,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던 찰나, 저의 눈과 뇌리에 꽂히던 시편 구절이 있었습니다. 시편 8편에 나오는 사람이 무엇이기에라는 문장이었습니다. “도대체 인간이 무엇이기에 하느님 당신은 이토록 우리에게 애절 하십니까라는 의문으로 시작된 저의 성소 갈등은 완전치는 않았지만 확신어린 믿음으로 종지부를 찍을 수가 있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사는 것이 나에 대한 당신의 애절함에 응답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 그분의 애절함을 어렴풋이나마 절절하게 느낄 수 있는 대목이 바로 고난받는 주님의 종의 노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월요일엔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를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이 선택한 사랑하는 종이 바로 이런 사람이라고 소개를 합니다. 성화요일엔 둘째 노래를 통해, 주님의 종이 해야 할 임무에 대해 말씀하고 있고, 오늘, 성수요일엔 셋째 노래를 통해, 주님의 종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그리고 그 삶이 고통과 죽음으로 끝난 다는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선택하는 순종의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인 넷째 노래는 이번 주 금요일인 성금요일에 드디어 듣게 될 것인데, 그토록 종은 고난을 받았지만 결국 그는 무죄한 이였음을 밝히며, 그가 왜 고난을 사서 받으려 하였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 수요일인 오늘, 고난 받는 종의 셋째 노래는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한 종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떠한 모욕을 받는 지가 묘사되고 있어요. 그 종은 하느님의 말씀이 자칫 그에게 가져다 줄 위험을 굳이 피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뺨을 내 맡기고있으며,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와 같은 사람이면 이러한 행동이 정말 가능할까 생각해 봅니다. 자기 목숨뿐만 아니라 가진 것(권력, 지위, , 체면 등)이 아까운 판에 이런 무모한 고통을 사서 당하는 바보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사회에서 가르치는 교육은 이러한 모욕을 받지 않도록,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는지에 대해 가르치고 있죠. 그런데 이 종은 이러한 모욕이나 죽음과도 같은 치욕을 피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이 종은 그럴만한 이유와 가치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과연 그 종은 왜 그랬을까요? 왜 그러고 싶어 했을까요?

 

답은 이미 셋째 노래의 본문 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종에게 있어서 유일한 안식처는 하느님이었습니다. 하느님만이 그의 무고함을 증명해 줄 분이시며 그분만이 고통을 견디게 해 줄 위안이라고 여겼던 것이죠. 과연 이 종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사람이었고, 이 종 만이 오직 세상의 악행과 죄악을 향해 그것이 그릇되어 있음을 말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희망은 이 세상이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그에게 주어지는 고통은 고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면에선 하느님께 대한 희망이었고 믿음이었으며 애절함이었습니다.

 

저는 단순히 이 종이 예수님이었고 그분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고 결과론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종은 우리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 여야만하기 때문입니다.

 

악의 면전에서 꽁무니를 빼지 마시기 바랍니다. 매질하는 악인에게 등을 맡기십시오. 수염을 잡아뜯는 악인에게 뺨을 내미십시오. 모욕과 수모를 당하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마십시오. 그리고 부끄러워 하지 말고 차돌처럼 얼굴빛 변치 마십시오. 그렇게 오직 하느님을 위한 종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산 결론이 이 세상에서는 죽음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옳고 그름을 가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당신은 이렇게 까지 했어야만 하셨습니까? 무엇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겁니까?”. 오늘도 이 질문을 마음에 담아 하루를 살아보렵니다.

 

0

추천하기

0

반대하기

첨부파일 다운로드

등록자이진욱미카엘

등록일2020-04-08

조회수2,887

  • 페이스북 공유
  • 트위터 공유
  • 밴드 공유
  • Google+ 공유
  • 인쇄하기
 
스팸방지코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