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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교류) 주님만찬 성목요일 말씀 묵상

죽음은 요즘 주요한 화제입니다. 한 바이러스가 인종과 지위, 빈부, 귀천, 신앙 등을 가리지 않고 전 세계에 걸쳐 사람을 계속 죽이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럴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코로나19로 이미 6만 명 가까이 죽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이 될 위험이 있다고 말합니다. 지금 이 부활절을 앞둔 시기에 죽음이 인간들을 노려보고 있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습니다.

 

사상 처음으로 가톨릭 주교들은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즉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기리는 연례 전례행사들에 참여하기 위해 교회에 가지 말라고 요청했습니다. 가톨릭 역사에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죠. 가톨릭교회는 박해와 재난, 전쟁, 전염병에 직면했을 때에도 자신의 신앙을 보전하고 기념하기 위해 맞서 왔습니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이상한 질문을 하나 던져볼 수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하느님에 대한 믿음보다 더 강한가? 바로 이것입니다.

 

각 정부들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위해 여러 제한조치와 격리봉쇄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모든 종교 집단은 기도 집회를 중지해야 했습니다. 가톨릭도 예외는 아니었죠. 일부 무모한 이들이 자신의 신앙을 위해 죽음에 도전할 태세이긴 하지만, 그들은 그 신앙이 뭔지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올해는 45일이 성지주일이고 이로부터 수난 주간이 시작되는데, 이때의 성지주일 행렬은 다른 때와 달리 참여자가 없는 행사가 되었습니다. 412일의 부활대축일도 대부분 신자들에게는 우울하고 외로운 행사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본당 사제들은 혼자서 신자들을 위한 수난 주간 전례를 봉헌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여기에는 가톨릭 신앙생활의 원천이자 정점인 성체성사가 제정된 성목요일 전례가 포함되고,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성금요일 전례도 포함됩니다. 이들 전례가 대중 없이 기념된다면 그저 한낱 예식에 지나지 않음에도 올해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지난 몇 주간, 가톨릭 신자들은 교회의 계명, 즉 주일 전례 참여의 의무(교회법 1246)를 위반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다가오는 주에 또 어겨야 할 계명이 있다면 그것은 해마다 하는 고해성사와 영성체의 의무입니다.

 

교회의 다섯 계명 가운데 하나에는 첫 영성체를 한 뒤의 모든 가톨릭 신자는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성체를 영할 의무가 있고, “연내 다른 시기에 수행할 정당한 이유가 없다면”, 이 계명은 부활 시기에 이행하여야 합니다.(교회법 920) 또한 교리교육에서는 영성체는 고해성사로써 준비한 뒤에 하도록 가르칩니다. 하지만 올해, 정부의 조치에 따라 신자들은 이를 저버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2000년의 역사를 가진바, 예상치 못했던 일에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한 시스템들을 갖춘 조직입니다. 설사, 전에는 인간을 공격한 적이 한 번도 없던 바이러스로 생긴 이처럼 심각한 상황이라고 해도 말이죠. 예를 들어, 주교들에게는 (각자의 관할 구역에 대해) 비상 시기에 사목적으로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면서 이러한 의무들을 해제하는 교령을 발표할 권한이 있습니다. 주교 대부분은 이미 그리하였고, 대신에 신자들이 각자의 집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수난 신비를 기념할지를 설명했습니다.

 

주교들은 지금 다른 선택지가 없습니다. 인도가 한 사례인데, 인도에서는 오는 415일까지 전국 격리봉쇄 조치가 실행된 상태입니다. 연방정부는 이 기간에는 모든 예배 장소가 대중의 출입이 금지된다. 어떠한 종교 집회도, 예외 없이, 허가되지 않는다.”고 명령했습니다. 위반자는 형사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아주 명확히 밝혔습니다. 유럽, 영국,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시아 대부분 국가에서 비슷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신앙인은 이런 의문을 가져 볼 수 있습니다. 국가를 따를 것인가, 신앙을 따를 것인가? 하느님과 인간, 누구에게 순종할 것인가?

 

가톨릭인들의 사회연결망에서는 이런 식의 많은 토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서로 주고받는 질문과 답변 대부분은 이런 질문들 자체만큼이나 너무 단순하고 미성숙한 것들입니다. 이런 주제넘은 토론들이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인간을 위한 사랑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불쌍할 지경입니다. “네 이웃과 하느님을 사랑하라그리고 나머지 가르침은 모두 이 사랑을 보완 설명하는 것일 뿐입니다. 간단히 말해, 인간에게 해로움을 초래하는 예배는 그리스도교 예배가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한 예배를 피하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는 행위라는 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해마다 해야 하는 의무적 고해성사를 빠트리는 것보다 고해성사를 하지 못한 채 죽을 것이라는 전망이 더 큰 걱정이 됩니다. 한 할머니는 내게 부활 판공을 받아야 코로나19로 죽을 준비를 할 수 있는데라고 눈물 어린 눈으로 말했습니다. 가톨릭 공동체들은 그간 수난 주간에 영성체와 고해성사를 피하도록 하는 가능성에 대해 전혀 생각을 해 봄도 없이 세세대대를 이어 신자들이 영적으로 미성숙한 상태에서 자라고 죽도록 놔둬 왔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가톨릭인들은, 다른 종교인과 마찬가지로, 종교와 영성이 서로 분리된 채 존재할 수 있음을 알지 못한 채, 계속해서 종교와 영성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황과 주교들이 신자들에게 이 부활시기에 (사제에게 갈 수 없으면, 고해 사제 없이 직접 하느님께 드리는) “개인적 영성적 고해성사가 가능하고 또한 유효하다고 말했음에도 그것을 믿지 않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지금 이 죽음의 시기에 교회들은 닫혀 있고 사제들은 만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제와 교회는 잉여가 되는 것인가? 어느 정도는 그런 걱정은 맞는 말입니다. 참으로, 사제와 교회가 지금처럼 성사의 분배에 필요한 요소로서만 존재한다면 이들은 불필요한 존재인 것입니다. 어느 시점엔가, 사목자들은 사제직이란 단지 성사 집전을 넘어선 것이며 성사들의 유효성은 사제들이 하는 예식들이 아니라 (신자들의) 그리스도인다운 삶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와 그 사제직의 의미는 삶을 자신의 공동체와 나눈다는 자세의 총체성입니다. 공동체가 없다면 교회와 사제직은 무의미해집니다. 모든 세례 받은 가톨릭 신자는 그리스도의 이 나눔의 희생에 참여할 소명이 있습니다. 공동체를 위해 몸이 바숴지고 피를 흘리면서 말이죠.

 

우리가 주일마다 기념하는 것은 삶이든 죽음이든 두려워함 없이 부활을 기념하라는 요청입니다. 아마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전염병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 비 성직자화 된 교회를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들은 잉여가 되는가? 모든 종교적 건물들은, 성당들뿐 아니라, 신앙에 필요한 물건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사회학적으로 유용한 필수품의 의미가 더 큽니다. 건물들은 가톨릭 신자들이 성장하여 성령과 진리 안에서하느님을 예배하는 성숙함에 이르도록 도우는 데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한 사회 안에 있는 종교 건물들이 얼마나 많고 또 호화로운가를 보면 그 사회 안에서 그 종교가 차지하는 사회경제적 영향력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물들은 신앙의 깊이에 대해 아무런 말도, 그것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안합니다. 이 전염병을 겪으면서 우리는 우리가 영성의 이름으로 창조해 낸 이런 호화로운 쓰레기를 이해할 기회를 얻고 있습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이해가 그것입니다.

 

죽음의 전망은 우리에게 실제입니다. 바로 지금뿐 아니라, 늘 그래 왔습니다. 그 공포는 코로나19 때문에 아무도 나를 돌보는 이 없이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거리에서 돌보는 이 없는 상태에서 태어나고, 살고, 죽어 왔습니다. 보기를 들자면, 코로나 때문이든 다른 이유든, 델리의 길거리에서는 날마다 10명이 죽습니다. 이 코로나로 인해 성당에 가지 못하는 시점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한 성 목요일인 오늘, 그 거룩한 성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말리고 있는 교회를 보면서, 그리고 성당에 함께 모이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보면서, 다시금 부활을 희망하며 그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해야 하겠습니다.

 

- 크리스토퍼 죠셉

 

(제가 생각했던 바를 잘 정리해 놓은 글이 있어서 오늘 주님 만찬 성목요일 강론은 이 글로 대신하겠습니다. 약간의 첨삭과 저의 견해가 포함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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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이진욱미카엘

등록일2020-04-09

조회수2,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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