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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교류) 연중 21주간 수요일 말씀 묵상

연중 21주간 수요일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27-32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7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28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29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30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31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32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이야기1. 춘추시대 어떤 초나라 사람이 매우 값진 진주를 얻었는데 높은 값에 팔려고 한 가지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향내 나는 나무로 작은 상자를 만들고, 진주를 상자 안에 넣은 다음, 여러 가지 보석으로 상자의 겉을 장식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 놓으니 과연 비싼 물건처럼 보였습니다. 드디어 기쁜 마음으로 진주 상자를 들고 시장에 나타나자, 정나라 사람 한 사람이 다가와서 진주 상자를 보고 마음이 금방 끌려서 흥정을 했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진주 상자를 샀습니다. 그는 진주 상자를 이리 보고 저리 보며 눈을 뗄 줄 모르다가 반나절이나 살펴본 후에야 비로소 뚜껑을 열었는데 그 안에 진주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초나라 사람은 정나라 사람이 매우 좋아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정나라 사람은 그 상자만을 사고 진주는 초나라 사람에게 돌려주고는 흐뭇하게 떠나버리고 맙니다.

 

이야기2. 정나라 사람이 신을 사러 장에 갔습니다. 그는 장에 가기 전에 먼저 신을 사기 위해 발 치수를 쟀습니다. 그런 후, 장에 간 정나라 사람은 맘에 드는 신을 고른 후 자신의 발 치수에 맞는 신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런데 아뿔싸!발 치수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발 장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내가 발 치수 적어둔 종이를 깜빡 두고 왔네. 내 얼른 가서 가져옴세.” 그는 바삐 집으로 돌아가 종이를 가지고 장터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신발 장수는 이미 가게 문을 닫은 뒤였습니다. 곁에서 보던 이가 어이없어 하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째서 직접 신어보질 않았소?” 그러자 정나라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로 잰 치수는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한 때 시대를 풍미했던 유행어 뭣이 중헌디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영화 곡성에 나오는 명대사였죠. 영화에서 배우는 이렇게 말합니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뭣이!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 어쩌면 뭣이 중헌디?”라는 의문은 중국 고전 한비자에 나오는 이야기1(매독환주, 買櫝還珠), 이야기2(정인매리, 鄭人買履)의 모습을 살고 있는 우리네들에 대한 통렬한 반성을 요구하는 외침처럼 들립니다.

 

혹자는 이런 얘기를 합니다. 예배드리면 죽인다고 칼이 들어올 때, 목숨을 걸고 예배드리는 것이 신앙이라고, 그러나 예배 모임이 칼이 되어 남들의 목숨을 위태하게 하면, 모이지 않는 것이 신앙이라고 말이죠. 누구를 위한 신앙이고 무엇을 위한 예배인지 모른 상태에서 하는 되는 모든 예배는 맹목이며, 때로는 독이 된다는 사실은 뱀이 물을 마셨을 때 그 물이 무엇이 되는지만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복음, 즉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오셨다면서 저주에 가까운 불행을 선언하셔야만 했을까요? 오늘 말씀을 마지막으로 하는 마태 복음의 일곱 가지 불행선언은 무서우리만치 차갑게 느껴지기만 합니다. 마치 사자가 싸움을 앞두고 으르렁 거리는 듯한, 뱀이 먹잇감을 앞두고 독을 품을 입을 벌리는 듯한 독기와 분노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먼저 접하고 알고 있는 이들이 그 지식을 백성들에게 전해야 하는 임무를 소홀히 한 자에 대한 불행선언!’, ‘개종자 하나를 얻기 위해 엄청난 낭비를 강행하도고 개종자를 얻으면 자기도취에 빠진 광신자로 만들어 버리는 이들에 대한 불행선언!’, ‘하느님의 이름으로 헛된 맹세를 일삼는 자들에 대한 불행선언!’, ‘십일조의 정신은 뒤로 하고, 왜 지켜야 하는지는 유념치 않은 채, 목적보다 행위를 더 강조하며 율법의 가치를 전도시키는 자들에 대한 불행선언!’, ‘율법의 목적이 속이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상관없이 겉만 거룩한 척하는 백성이 되게 만드는 이들에 대한 불행선언’!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복음 말씀인, ‘겉과 속이 다른, 속에 위선과 불법이 가득 찬 이들에 대한 불행선언!’, 그래서 자신들은 조상들과는 달리 의로운 이들이라고 자화자찬에 눈이 멀어, 눈앞에 있는 하느님과 그분의 뜻은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불행선언!’, 예수님이 한번 내 뱉으면 있는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는 말씀으로 선포하신 불행한 이들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아니겠지요라는 유다 이스카리옷의 변명을, “하나님 까불면 죽어라고 하늘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던 모 교회 전OO 목사의 교만을 오늘날 우리도 나도 모르게 자행하며 사는지도 모릅니다. 뭣이 중헌지 모른 채, 이것이 신앙이고, 저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이들은 모두 예수님이 선언하시는 영원히 불행할 자들에 해당함을 기억합시다.

 

하지만, 이러한 예수님의 불행선언은 하루 멀다 하고 매일 같이 우리의 스마트폰을 울리는 재난문자와 같은 하느님의 염려와 걱정과 사랑이 담겨있다는 사실 역시 기억해야 합니다. 누구는 재난문자를 받고도 콧방귀를 끼지만, 그 걱정 어린 염려의 마음을 아는 누구는 감사하겠죠. 그런면에서 저는 오늘 말씀이 참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불행선언의 대상에서 벗어나 행복선언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게 다함께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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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이진욱미카엘

등록일2020-08-26

조회수2,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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